id: 10060    nodeId: 10060    type: General    point: 46.0    linkPoint: 1.0    maker: cella    permission: linkable    made at: 2005.12.27 10:22    edited at: 2005.12.27 10:24
서재의 결혼

http://h21.hani.co.kr/section-021076000/2005/12/021076000200512070588044.html

두 서재의 결혼을 축하합니다


[기자가 뛰어든 세상]

신혼생활 한달째 대치중이던 부부의 책들을 섞는데 성공한 남종영 기자
‘론리플래닛’은 채워져 행복하고, 겹치는 <황금빛 모서리> 한권은 헌책방으로


▣ 글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서재 결혼시키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혼이 10월22일이었으니, 나의 책과 그녀의 책은 한 달째 섞이질 않고 대치 중이었다. 결혼을 하면 책을 섞는 것인가?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결혼 반년차 책 담당 유현산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서서히 섞이고 있긴 한데, 우리는 책장을 따로 쓰니까.”


TV는 방으로 보내고 거실을 서재로


여하튼 우리는 책을 강제로 섞기로 했다. 서재가 없었지만, 거실을 서재로 만들었다. 텔레비전과 비디오를 안방으로 보내고, 책장을 맞춰 한쪽 벽면을 채웠다. 그리고 가운데에 실험실용 책상을 들여놨다.

11월25일 밤, 우리는 실험실용 책상에서 밥을 먹은 뒤 서재 결혼에 착수했다. 그녀는 “도서관에 쓰이는 십진분류법으로 책을 정리하겠다”고 선언을 하고, 곧바로 나를 시험에 들게 했다. 나름대로 훌륭한 여행책 컬렉션을 갖췄다고 자부하는 나는 ‘여행책 우선주의’를 들이대며 무사통과했다. 면접으로 진행된 시험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 중복된 책을 쌓아보니 그녀와 나는 '동시대인'이었다. 우리가 살았던 시대와 우리 안에 살았던 고민과 감정은 출판 순서대로 스쳐간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어디에 해당하지?”

“당근 여행책이지. 답사나 여행이나.”

“<우리 꽃 백 가지>와 <궁궐의 우리 나무>는? 자연과학 아냐?”

“여행갈 때 보잖아.”

“나의 위대한 탐험가 컬렉션은 어떻게 하냐? 어니스트 섀클턴의 극지탐험을 기록한 <인듀어런스>랑, 온갖 탐험과 정복이 망라된 <퀘스트>는?” “그것도 여행책에 꽂자. 우리는 북극권을 여행할 거잖아. 북극권과 관련 있는 애들이잖아.”

“다 갖다 꽂아라. 솔직히 섀글턴은 남극이다.”

대개의 책들은 십진분류법에 따라 꽂혔다. 이 분류법을 고안했다는 멜빌 듀이는 언론과 사상을 100번대에, 마르크스는 300번대에 꽂았겠지만, 우리는 책장의 한계로 언론과 사상, 마르크스에다 통일과 북한까지 한 칸에 우겨넣었다. 600번대 예술과 800번대 문학은 대체로 지켜졌으나, 추리소설은 별도로 분리돼 당당하게 한 책장을 차지했다. 900번대 후반에 꽂혀야 할 여행책도 별도의 자리를 얻었다.

두 집에 흩어져 살았던 론리플래닛(Lonely planet·가장 정확하다는 평을 받는 여행 가이드북)들은 행복해졌다. 그녀의 <론리플래닛 타이>와 나의 <론니플래닛 방콕>은 동포를 만났고, 나의 <론리플래닛 네팔>은 그녀의 한글판 <인도>와 <베트남> 옆에 안착했다.


같은 책 46권, 동시대인의 증거


행복한 책들은 론리플래닛만이 아니었다. 신현림의 첫 시집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는 두 번째 시집 <세기말 블루스>를 만났고,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10일>은 김학준의 <러시아혁명사> 옆에 자리를 잡았다.



△ 서재 결혼시키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도서관 십진분류법으로 책을 분류하기도 했지만 새로 맞춘 책을 분류하기로 했지만 새로 맞춘 책장 사정에 따라 책을 꽂아나갔다.





골칫덩어리는 분류가 모호한 책들이었다. 이를테면 <안정효의 영어 길들이기>와 조동일의 <우리 학문의 길>은 어떻게 할 것인가? “박관용이 쓴 <다시 탄핵이 와도 나는 의사봉을 잡겠다>는 어디에 놓지?” “버려!”

그렇게 밤마다 닷새를 정리했다. 그녀와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1800권을 넘어갔다. 둘 다 똑같이 가진 책은 46권이었다. 20권을 살 때마다 똑같은 책 1권을 집어든 셈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참으로 같은 시대를 살아왔다. 우리는 대학에 들어와 <다시 쓰는 현대사>로 역사를 다시 배웠으며, 선배들이 사준 <노동의 새벽>을 가슴에 끼고 다니다가, 박노해가 <참된 시작>을 들고 나와 황망해했으며, 이진경의 <철학과 굴뚝청소부>에 이르러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폐기’하고 라캉과 알튀세를 훔쳐봤다. <안정효의 영어 길들이기>를 안고 취직을 걱정했으며, 직장인이 돼서는 <다빈치 코드> 같은 베스트셀러를 찾아다녔다.

‘당신이 어디에 사는지가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게 아니라 ‘당신이 무슨 책을 읽었는지가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우리는 80년대의 여진 속에서 산 297세대(7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에 대학을 다닌 20대)였다. 물론 지금은 서른을 훌쩍 넘겼지만.


중복된 2권 중 1권은 헌책방에 팔기로 했다. 어차피 늘어날 책, 조금이라도 줄여야 했다. 11월30일 밤 겹친 책을 쌓아놓고 ‘퇴출 심사위원회’를 열었다. 나와 그녀는 최대한 손때 묻은 자신의 책을 남겨둬야만 했다. 몇 분 동안의 협상 끝에 잔류 우선 원칙을 정했다. 다음 순서대로 생존을 보장받는다. ① 남에게서 선물받은 책 ② 밑줄이 쳐져 있거나 메모가 있는 책 ③ 읽었던 책 ④ 하드커버가 표지인 책. 그리고 책에 얽힌 남다른 사연이 있다면 구제될 수 있다는 부칙을 세웠다. 누구의 추억이 우선인가를 재보자는 것이었다.

김중식의 <황금빛 모서리>라는 시집도 각자 가지고 있었다. 나는 왜 지금은 이름도 가물가물한 이 시인의 책을 사게 됐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그녀의 책에선 1997년 3월23일 진주발 서울행 중앙고속 승차권이 나왔다. “진주라 하면, 공군 훈련소가 있는 곳 아니야? 옛날 그 남자?” 옛날 그 남자는 지금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중식 시인은 지금 그녀의 회사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그녀는 모 신문사에 다니는 기자다). 옛사랑의 흔적 덕분에 나의 책은 가차없이 퇴출됐다.



△ 서재 결혼 이레째, 헌책방에 가서 중복된 책을 팔았다. 386세대 성욱제씨의 <프랑스혁명사 3부작>도 새 주인을 찾으러 떠났다.







너희를 드넓은 책의 바다로 보내나니


마르크스의 <프랑스혁명사 3부작>은 둘 다 헌책방에서 사놓고 읽지 않았다. 내 책의 앞장에는 ‘고려대 89670**’가, 그녀의 책에는 ‘연세대 사회학과 85090** 성욱제’가 써 있었다. 때가 덜 탄 고려대생 89학번의 책이 남고 연세대생 85학번의 추방이 결정됐다.

이튿날 서울 용산의 헌책방인 뿌리서점에 갔다. 35권을 팔아 2만2천원을 받았다. 386세대인 연세대 85학번 성욱제의 <프랑스혁명사 3부작>도 드넓은 책의 바다로 나갔다. 297세대인 나와 그녀의 책은 또 어떤 주인을 만날까. 나의 <황금빛 모서리>는 또다시 누군가와 서재결혼식을 하자마자 퇴출되진 않을까.






‘맞춤형 책장’ 이용해보라


책은 많은데 집이 좁으면 어떻게 하나… 벽돌과 합판으로 직접 만들수도





△ 신혼집 거실 한 벽을 채워 짜맞춰 넣은 맞춤형 책장.




미국의 책 칼럼니스트 앤 패디먼은 <서재 결혼시키기>(Ex Libris)에서 결혼 5년 만에 장서를 합병하면서 서재 결혼은 좀더 깊은 수준의 친밀함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개인의 성장사가 다르듯, ‘앎’이라는 나무의 가지가 뻗은 방향과 모양은 사람마다 다르다. 서재 결혼은 상대방의 나무를 응시하는 의식이며, 혼인한 서재는 ‘앎’이라는 두 그루의 나무가 교접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만큼 감상적이지 않다. 사람의 결혼처럼 서재 결혼의 가장 큰 적은 ‘집 평수’라서 많은 신혼부부들이 서재를 결혼시키기는커녕 책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기를 끄는 게 ‘맞춤형 책장’인데, 한쪽 벽면을 아예 책장으로 덮는 방법이다. 맞춤가구 전문점에서 방 크기에 맞춰 책장을 맞춤 제작해준다. 목재에 따라 가격이 다양하고, 미닫이형 2단 책장도 맞출 수 있다.

책 칼럼니스트 조희봉(35)씨는 벽돌과 합판을 이용해 책장을 손수 만든다. 벽돌을 4장 쌓고, 벽돌 위에다 합판을 얹는 방식이다. 큰 책을 꽂을 땐 벽돌 5장을 쌓는다. 8층을 쌓으면 보통 천장에 닿는다. 벽돌은 벽돌공장에서 장당 200~300원에 살 수 있고, 합판은 목재사에서 원하는 크기로 잘라준다.

장서 분류는 책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선물받은 책을 따로 놓거나 좋아하는 분야로 컬렉션을 구성한다. 책장이 모자라면 퇴출 대상을 선정해야 한다. 보통 잡지나 계간지가 0순위다. 아쉽다면 기념비적인 호를 컬렉션으로 모아보라. <한겨레21>로 치자면 ‘양심적 병역 거부’ 문제를 처음 제기한 345호를, <창작과 비평>은 황석영의 방북기가 실린 1989년 겨울호를 남겨두는 것처럼 말이다. 1980년대 언저리의 사회과학 서적들은 푸대접받기 일쑤다. 조씨는 “시대가 많이 변했고, 다시 보고 싶어도, 나도 그런 생각이 없는 것 같고…. 언젠가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헌책방에 500원 받고 팔았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못할 짓 같더라”고 말했다. 좁은 공간 때문에 책을 어디론가 보내면, 책이 품은 시대와 추억까지 함께 보내는 것 같아 안쓰럽다. 한국 사회에선 이래저래 집이 크고 볼 일이다.












텔레비전 방을 공동서재로


출판인 출신 구둘래 기자가 말하는 ‘동거인’과 서재 결혼시키기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상경하면서 (거짓말 안 보태고) 모든 책을 버리고 왔다. 말하자면 보따리 상경이었다. 하지만 상경의 1막1장 터미널에서부터 다시 책과의 인연 1막1장이 시작됐다. 그리고 경기도 고양시 화정, 서울시 불광동, 신림동, 경기도 안양시 평촌 다시 화정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내 깐에는 버렸지만 책은 점점 더 불어나기만 한다. 무거운 책에 짓눌린 책장도 여러 번 바뀌었다. 언니가 신혼살림으로 장만했다가 내놓기에 냉큼 갖고 온 책장은 합판이 너덜거리더니 바람 부는 이삿날 넘어져 생명을 다했다. 옷장은 남대문표 뤼이비통 스카프로 가렸지만 책장은 튼튼하고 그래서 비싼 놈으로 장만했다. 책장은 조립식이라 연결해서 점점 불려나가는 ‘특장점’이 있는 놈이다. 그걸 믿고 지금 사는 화정으로 가면서는 잡지만 버리고 책장을 사서 덧붙였다.

화정으로 이사할 때는 같은 회사 동료 김양(가명)이 합류했다. 자연히 ‘개인적’이랄 수 있는 책장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김양은 소박하게 우리 집에 들어왔다. 진짜 집은 멀리 두고 회사 가까이의 우리 집에 몸만 두겠다는 것이니까(나도 사실 우리 언니 집의 관리인이다). 김양의 오빠 차로 배달 온 간소한 살림에는 작은 책장도 하나 있었다. 갖고 온 책들은 간단히 이 책장이 소화했다.

그리고 몇 개월, 문제는 우리가 다니는 직장이 출판사라는 것이었다. 5개의 자회사와 어린이 브랜드를 거느린 이 출판 ‘대기업’에서는 직원들에게 출간한 책을 한 권씩 나눠주었다. 한 달에 30~40권의 책을 집으로 날랐다. 둘 다 사양치 않으니 한 달에 60~80권의 책이 쌓이는 셈이다. 각자 방의 책장은 넘치기 시작했다. 출판사 직원이라 일에 참고하는 것 역시 책이었고, 모이면 하는 이야기도 책에 관한 것이었다. 참고자료로 산 책, 취미로 읽기 위해 산 책도 쌓여갔다. 가까이 살던 언니의 집이 나의 제2의 서재이자 책의 도피처가 됐다. 집에 책이 두 권 있을 필요가 없으니 어린이, 경영, 실용서는 받자마자 언니 집으로 갔다. 김양도 몇 권의 책들을 본집으로 갖고 갔다. 둘에서 하나가 되어, 특별히 누구 것이랄 게 없게 된 책은 자연스럽게 공동 공간인 텔레비전 방에 쌓여갔다. 너 보라고 샀어, 너 먼저 봐, 빌려왔어, 이거 재밌다, 너 참조해 하는 책들도 공동 공간에 들어갔다.

그렇게 1년, 텔레비전 방에 책장을 세워 넣게 됐다. 이 책장은 각자 방에 있는 책들이 잠시 거닐다 가는 산책로이기도 하고, 네 책 내 책이 없는 무소유의 공간이기도 한데, 손님방이기도 해서 방문한 사람들이 그냥 가서 뒤적이기도 한다. 보기 좋으라고, 좋아하는 책들을 살짝 꽂기도 한다. 내 방에는 가끔 읽지 않은 책들의 귀신이 나와 내 잠을 방해하지만 공동 공간의 책은 나를 짓누르지 않는다. 책들을 낑낑 싸갖고 다니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고 책에 이름을 적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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