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에 산다
전북 임실군 강진면 정종술·강복석 씨 부부
호두나무 아래서 반지를 끼워주리다
정종술 씨는 신들린 듯 나무만 심어온 사람이다. 그가 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은 군 제대 후인 20대 중반부터. 남들이 도시로 떠날 때 임실의 오지인 백련산 자락에 둥지를 튼 그는 이후 평생을 독림가로 살아왔다. 우직한 남편의 열정에, 아내 강복석 씨도 결혼반지, 아이들 돌반지까지 팔아가며 든든한 후원자가 돼줬다.
글 이승환 기자 사진 임승수(사진가)
한해의 계획으로는 곡식 심는 것만 한 게 없고, 십년의 계획으로는 나무 심는 것만 한 게 없다고 했던가요. 요즘 들어서야 이 금언을 실감하지만, 20대 중반 처음 나무를 심을 때만 해도 나무로 큰돈을 벌겠다거나 산림녹화에 일조하겠다는 등의 거창한 포부는 없었어요. 헐벗은 산을 나무로 채우는 게 재미있어 마냥 매달린 것뿐이었지요.”
정종술 씨(61)는 평생을 나무와 함께해온 사람이다. 독림가로서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그의 농장은 임실군의 명산인 백련산(754m) 서쪽 자락에 있다. 아니, 농장 면적이 40만 평쯤 되니 산기슭 일부만이 아니라 서쪽 산자락 대부분이 그의 농장인 셈이다.
‘백련농장’은 조림·조경수와 유실수가 어우러진 복합임업장이다.
10만 그루가 넘는 단풍나무·왕벚나무·느티나무·소나무·잣나무에, 호두나무 2500그루, 은행나무 1500그루, 두릅나무 1만 그루, 고로쇠나무 500그루 등 다양한 유실수와 특용수가 저마다 적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녹음을 자랑한다.
이 밖에도 소나무 숲에서는 6만 본의 참나무 원목이 표고를 밀어올리고 있으며, 호두나무 그늘 아래로는 100여 마리의 염소들이 뛰놀고 있다.
결혼반지, 돌반지까지 팔아가며 일군 농장
이웃하고 있는 덕치면이 고향인 정씨는 스물여섯 살 때 백련산 자락에 있는 오지인 이윤마을로 들어왔다. 값싼 땅을 물색하던 중 발견한 곳이 여기였다. 백련산은 해발은 그다지 높지 않지만, 계곡의 깊이나 기울기가 웬만한 준산 못지않다. 지금은 차가 드나드는 신작로가 놓였으나, 새마을운동 전만 해도 절벽으로 난 좁은 비탈길로 다녀야 했기에 ‘송아지가 들어와 어미 소가 되고 나서는 못 나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여기 땅값이 평당 20~30원 했어요. ‘껌값’이었지요. 부모형제들의 도움에 빚도 좀 내서 6만 평을 구입해 나무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로도 여윳돈이 생길 때마다 계속 땅을 사 모으며 나무를 심어나갔지요.”
처음 심은 나무는 낙엽송과 잣나무로, 당시 목재용 나무가 인기를 끌 때였다. 그러나 용재수의 경우 적어도 15년은 지나야 돈이 되는 등 자본의 회임기간이 길어 지속적으로 농장을 일궈나가는 데 한계가 있었다. 정씨는 1980년대로 들어서며 유실수도 함께하는 복합임업으로 전환했다. 산의 7~8부 능선에는 표고 재배용 참나무를 심고, 그 밑으로는 유실수를 심었다. 그때 주종으로 선택한 게 호두나무였다. 마을에 100년이 넘었어도 여전히 풍성한 결실을 맺는 호두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그걸 눈여겨본 정씨는 산비탈을 호두나무로 채워나간 것이다.
밥벌이 없이 나무만 심을 수는 없는 법. 정씨는 1976년 임실군청에 취직을 했다. 요즘이야 공무원 시험이 수십,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보이지만, 당시만 해도 공무원 되는 게 어렵지 않던 시절이었다. 공직 생활하며 정씨는 월급을 받는 족족 땅을 넓히고 나무를 사 심었다. 평일에는 임실읍내에서 생활하다가 주말이면 어김없이 농장으로 들어왔다. 정씨의 나무 사랑이 어느 정도였냐 하면, 주위에 애경사가 있을 경우 애사에는 얼굴을 비쳤지만 경사에는 인편에 축의금 봉투만 부탁하고 산으로 달려왔을 정도였다.
공직 생활을 시작한 두 해 뒤 결혼도 했다. 동료가 신탁은행(현 하나은행)에 다니는 아가씨를 소개해줬는데, 그녀가 바로 나무에 빠진 정씨를 대신해 가계를 꾸려온 아내 강복석 씨(56)다.
“결혼 후 아내가 반대할까 봐 근 7~8년은 농장에 데려오지 않았어요. 산이란 게 여간해서는 돈 들인 표가 안 나잖아요.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와서 보고는 적잖이 실망하는 눈치입디다. 하지만 크게 반대는 안 하더군요. 내 열정을 꺾을 수 없는 데다, 향후 나무도 돈이 된다는 것을 아내도 알고 있었던 거지요.”
정씨의 월급은 모두 산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생활비 한 푼 가져다주지 않았지만, 강씨는 군소리 없이 자신이 직장 생활하며 번 돈으로 가정을 꾸렸다. 오히려 남편의 우직함을 믿고 결혼반지, 아이들 돌반지까지 팔아서 나무 사는 데 보탰다. 강씨는 결혼 이후 18년을 더 직장 생활하다가 큰아이가 대학에 진학할 무렵 명예퇴직을 하고 남편과 함께 나무를 돌보기 시작했다.
나무 농사 못지않게 자식 농사도 잘 지어
정씨 부부의 하루 일과는 새벽 5시, 농장 전체를 한 바퀴 돌아보며 그날 할 일을 구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아침식사 후 일꾼들을 데려오며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간다. 농장 규모가 워낙 커 두 사람이 모두 감당할 수 없기에 연중 동절기를 빼고는 인근 주민들의 일손을 빌리는데, 추수철 외에는 따로 돈이 나올 데 없는 농촌인지라 모두들 정씨네 농장 작업을 선호한다. 정씨 부부는 지역 농민들의 소득 증대에도 일조하고 있는 셈이다.
7~8월은 한창 호두가 여물어가는 철이다. 호두는 해거리가 심하고 청설모의 피해가 많아 나무 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호두가 쏠쏠한 수입을 올리며, 요즘 정씨 부부는 호두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호두는 백련농장의 주 수입원이기도 하다.
“처음 호두나무를 심을 때만 해도 미친놈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중국산이 밀려올 텐데 돈이 되겠냐는 것이었지요. 군에서도 보상금 줄 테니 베어내라고 했어요. 하지만 이 나무들은 나의 분신입니다. 한 접에 10원 받고 팔더라도 호두나무는 어림없다며 오기로 버텼지요. 그것이 지금은 효자 수종이 됐습니다. 시장에 중국산이 널렸지만 건강을 챙기는 사람들은 꼭 국산을 사먹더라고요. 수확철이면 호두가 없어서 못 팔 정도입니다.”
정씨 부부는 2500그루의 호두나무에서 연간 약 6t의 호두를 생산, 1억여 원의 조수익을 올리고 있다. 백련농장의 호두는 일교차가 큰 해발 400~600m의 고지대에서 생산하기 때문에 알이 튼실하고 고소한 맛이 뛰어나 소비자들로부터 인기가 높다.
호두 외에 표고와 은행, 조경수의 수입도 쏠쏠하다. 가을이 무르익으면 정씨 부부는 호두와 표고·은행의 수확 및 선별 작업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다. 조경수는 수령이 쌓이면서 수입이 되기 시작했다. 주로 정원수나 대형 공사 후의 조경용으로 나가는데, 연간 1000만~2000만 원의 수입은 꾸준히 들어온다.
정씨는 조림과 치산에 기여한 공로로 상도 여럿 받았다. 1985년에는 임실군민들이 주는 ‘임실 군민의 장’을 받았으며, 1992년에는 ‘산업포장’, 지난해에는 ‘대한민국 녹색대상’(은상)을 수상했다. 이름이 알려지다 보니 임실군에서는 지역을 위해 일해 달라는 주문도 많았다. 하지만 다른 일에 신경 쓰게 되면 나무와 멀어질 게 뻔하기에 정씨는 모두 사양했으며, 현재 한국산림경영인협회 부회장직만 맡고 있다.
“아직도 빚이 조금 남아 있긴 하지만, 오늘까지 농장 문을 닫지 않고 유지해올 수 있었던 것은 복합임업이 주효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동안 땅값도 꽤 올랐지만, 땅을 투기 수단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기에 나무를 심기 시작한 이후 판 땅은 하나도 없습니다. 손때 묻은 내 땅에서 나무 농사 열심히 짓는 것에 만족합니다.”
십년지계가 나무 심는 것이라면, 백년지계는 자식들을 잘 가르치는 것이다. 정씨 부부는 자식 농사도 잘 지었다. 큰딸 현(28)씨는 서울 동부지방검찰청 검사로 재직 중이고, 둘째딸 은(26)씨는 한양대 조교, 아들 병건(23)씨는 군 제대 후 복학 준비 중이다. 아이들이 잘 자라준 것을 두고 강씨는 “모두 호두 덕분”이라고 말한다. 호두 먹으면 머리 좋아진다는 속설이 있듯, 어려서부터 호두를 많이 먹이며 키웠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 비행기 한번 타봅시다”
장마 중, 잠시 비 그친 틈을 타 집을 나서는 정씨 부부. 지금 살고 있는 집은 20년 전 구입한 낡은 농가주택을 리모델링한 것으로, 5년 전 정씨의 퇴직과 함께 모든 생활 터전을 이곳으로 옮겼다. 호두나무 숲으로 들어서니 계곡을 타고 올라온 시원한 바람이 금세 이마에 맺힌 땀을 식힌다. 알이 차고 있는지 호두는 벌써 아이 주먹만 해졌다.
아들 병건이를 농장 후계자로 키우자는 둥, 나무 기른다고 변변한 해외여행 한번 못했는데 이제 우리도 비행기 한번 타보자는 둥, 숲을 거닐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정씨 부부. 그때 오래전부터 작심하고 있었던 듯 정씨가 마음 깊숙이 간직한 속내 하나를 터놓는다.
“무엇보다 올 가을에는 당신한테 근사한 반지 하나 해주고 싶어. 이 호두나무 아래서 끼워주리다.”
문의 063-643-1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