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A. C. Grayling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 따르면:
여러 철학적 문제들은 언어에 대한 오해를 풀어냄으로써
제거(혹은 치유)될 수 있다 (답을 제시하는 게 아니다).
초기에는 Tractatus 를 통해서, 일단 formal expression 으로 logically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의 영역(과학과 논리의 영역)을 정하고
이 영역 밖에 있는 철학적 문제들은 이러한 logical 표현으로 표현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인간의 보통의 언어로도 표현될 수 없다, 고 선언한다.
(즉, 인간의 일상 언어와, 예를 들자면 predicate calculus 와 같은 logical 하고
formal 한 language 가 등가라고 가정한 것이다.)
즉, 철학적 문제들이 인간의 언어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후기에는 초기에 했던 언어에 대한 등가 가정을 부정한다.
word 에 대한 understanding 이란 그 word 의 meaning 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그 word 를 어떻게 use 하는 지 안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은 community 의 form of life 에 달렸다.
(language 는 form of life 의 일부이고 독립적으로 분리해 낼 수 없다.)
form of life 란 그 community 의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다. custom 이라고 할 수도.
이 form of life 란 더무 다양하고 복잡해서 단일한 logical language system 으로
나타낼 수 없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사람들은 여러 레벨에서 여러 스케일의
community 에 동시에 속해 있고, 따라서 언어는 여러 forms of life 에 따른다.
언어가 중요하고, 언어는 공동체에 의존하므로,
물질적이고 객관적인 external real thing 이나
정신적이고 주관적인 internal mind 는 중요하지 않다.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것을 개인의 내적인 과정으로 인식하는 보통의 인식과 다르다.
이것은 마치, self 나 자유의지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기계론적 세계관을 연상시킨다.
external real world 는 그 자체가 독립적인 reality 를 갖는 게 아니라
(혹은, 그것은 알 수 없거나, 중요하지 않고)
"form of life -> 언어"를 통해서 reality 를 갖는다.
우리의 손, 의자 등의 사물은, 언어의 grammar(axiom 과 비슷한 것 같다)를 이루고,
따라서 Kant 등등의 철학자들이 그 사물들의 실재를, 언어를 이용해, 의심하는 것은
nonsense 라고 주장한다. (즉, 언어를 이용한다는 것은 언어를 받아들인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 grammar 도 인정한다는 것이라는 논리. 하지만 언어를 받아들인다는 게
그렇게 0 or 100 퍼센트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을텐데.)
게다가 reality 를 이런 식으로 정의하니까,
대부분의 구성원이 신을 인정하는 공동체에서는
신도 또한 form of life 를 통해 언어의 grammar 를 이룰 수 있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이것은 일종의 "집단적 solipsism" 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solipsism 과 같지는 않은데,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사람은
여러 레벨에 걸쳐 여러 community 에 동시에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하긴 그렇다면 "인류 (혹은 지성체) 집단적 solisism" 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인류 공통의 언어가 공식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몇몇 body language 는
인류 공통이다. 심지어 동물과도 communication 이 되는 경우가 있다.
먹이를 입에 가까이 가져가 대는 body language 를 생각해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