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 11941    nodeId: 11941    type: General    point: 59.0    linkPoint: 1.0    maker: cella    permission: linkable    made at: 2014.03.22 03:28    edited at: 2014.03.29 12:14
자유는 진화한다
Daniel Dennet 저. 이한음 옮김. 원제는 <Freedom Evolves>. 2003년 작품.

결정론은 자유의지와 양립할 수 없다는 일반적인 관점에 문제를 제기하고 양립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려는 시도.

아직 읽는 도중이지만 벌써 동의할 수 없는 주장들을 하고 있다. 이런 주장들을 조합하여 결국 위의 결론을 도출하려는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전체적으로는 말이 안되는 이야기를 할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양자역학적인 확률적인 세계관은 배제하고 고전역학적인 결정론을 염두에 두고 자유의지를 다루고 있다.

먼저, 2장 결정론을 다룰 사유도구: 저자는 Conway 의 Life 게임을 가지고 설명을 시도한다. 미시적으로는 결정론적으로 변화한다. 거시적으로 보면 glider 등등의 거시적인 구조물들이 나타나고 심지어 이들이 자신의 운명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저자는, 그러므로 결정론적인 현실세계에서도 모든 것이 '불가피'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피하지 않은' 게 아니라, '불가피해 보이지 않는'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서, 영화에 집중할 때에는 주인공이 개개의 악당의 공격을 회피하기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주인공이 어떤 공격을 피하고 어떤 공격을 피하지 못하는지는 모두 결정돼 있다. 즉, 미시적인 관점, 그리고 전체를 조망하는 초거시적인 관점이 아닌 중간의 거시적인 관점에서만 보자면 회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책에서 사회학이나 심리학을 다루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철학적인 논의를 할 때 그런 제한적인 관점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3장 결정론에 관한 생각: 3 가지를 주장하고 있는데 그 중 첫 번째로, 저자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골프 퍼팅을 했고 결국 안 들어갔지만) 어쩌면 공이 들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것이 결정론과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일반인들의 상상 속에서는 퍼팅시점에서의 초기조건이 실제로 일어난 초기조건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고 미시적으로 아주 약간의 불일치가 있는 것도 허용하며, 그러면 chaos 이론에 따라 거시적으로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주장은 맞지만, 그것이 결정론과 양립할 수 있다는 주장은 맞지 않다. 결정론적 세계에서는 퍼팅시점의 초기조건에서 미시적으로 약간이라도 변경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므로. 저자의 다른 2 가지 주장들도 그런 식이다.

4장 자유지상주의를 위한 청문회: 저자가 결정론을 부정하는 자유지상주의의 시도 중 최선이라고 평가하는 Robert Kane 의 <The Significance of Free Will> 을 중심으로 다룬다. 그런데 정작 Kane 의 시도의 핵심은 잘 설명하지 않고 그냥 시도가 성공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내린다. 로저 펜로즈가 주장하기도 했었던, 양자역학의 미시적 요동이 거시적으로 불거진다는 주장에 대한 언급도 잠깐 나오는데, 다른 책에서는 이런 주장이 별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얘기를 읽었었는데, 이 저자는 의미가 있다는 식으로 평하는 것 같다.
흥미로운 대목은 William James 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자유' 행위가 진정으로 새로운 것, 즉 나, 이전의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나, 이전의 나에게 어떻게 책임이 있을 수 있겠는가?" 즉, 환경을 배제한 '나'의 자유로운 결정이라는 것도 알고보면 과거의 '나'에게서 비롯됐으므로 이미 결정된 것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결정된 게 아닌 부분은 단순히 무작위에서 온 부분인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내 생각에는, 자유의지가 결정론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 그리 자랑스러울 것도 없는 게 된다.
"포유동물은 없다"는 명제에 대한 논리적 증명 시도를 통해 (과거 어느 시점에 비포유동물이 포유동물을 나았다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듯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 마음이 결정론적으로 작동하지 않은 사건이 한 번 이상 있었어야 한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도 마음이 여러 번 요동하고 있다면 (저자가 확실하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양자적 요동이 거시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확실한 결론은 내리지 않고 저자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자유의지의 존재를 갈망하는 것이 종교인들이 신을 갈망하는 것처럼 쓸데없는 것 아니냐는 얘기로 마무리한다. 이 주장은 그럴듯하다.

5장 그 모든 설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진화론을 이용해 어떻게 다세포 생물이 생기는지에 설명한다. 유전자 결정론과 환경 결정론 등등에 대해 논한다.

6장 열린 정신의 진화: 진화론을 이용해서 문화의 생성을 설명한다. meme, 죄수의 딜레마 등등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7장 도덕 행위자의 진화: 이타적인 행동이 어떻게 생긴 것일까를 진화론을 이용해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정작 죄수의 딜레마의 "iteration"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Rober Frank 의 주장을 주로 언급한다.다. 그리고 George Ainslie 의 <Breakdown of Will> 을 소개한다. 여기에서는 현재와 미래의 자신을 보는 관점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예를 들어 현재의 1달러는 미래 어느 특정 시점에서는 얼마에 해당하는가? 과연 이렇게 구체적인 가치를 조사해보면 체계적이면서 재미있는 연구가 가능했을 것 같다.

8장 당신은 무지한가?: 먼저 Libet 의 유명한 실험을 소개한다. 피실험자로 하여금 아주 빨리 움직이는 시계(2.65초마다 한바퀴를 도는 시계)를 보고 있다가 내키는 시점에 버튼을 누르게 하는 실험. 그 시점을 기억하고 있다가 나중에 실험자에게 말하면 실험자는 피실험자의 "의식적인 의도"가 나타난 시점, 즉 결정을 내린 시각(= 시계를 보고 인지하는 시각)과 피실험자의 몸에 장착한 센서가 뭔가를 감지한 시점을 비교한다. 신기한 것은 피실험자가 의식적으로 결정을 내리기 300ms 전에 이미 센서에 변화가 감지된다는 것이다. 결정을 내린 시각으로부터 150ms 이후에 버튼이 눌려진다. 운동뉴론의 전달 50ms 를 제외하면 100ms 정도의 결정을 되도릴 여유시간이 있는 셈이다. 그래서 라마찬드란은, 인간은 free will 이 아니라 free won't 를 갖고 있다고 얘기하기도 했다고.
이 실험은 자유의지란 없다, 라는 주장의 근거로 많이 인용된다. 저자는 그런 주장에 반박하는 가설들을 몇 개 소개한다. 한 가지 유력한 가설은 퍼트리샤 처칠랜드(Churchland)의 실험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피실험자에 빛이 반짝이면 버튼을 누르라고 하는 실험이었다. 그런데 빛이 반짝인 시점에서 버튼을 누르기까지 350ms 가 걸렸다고 한다. 저자의 주장은, Libet 의 실험에서 센서의 시점에 피실험자가 결정을 내렸어도 그 시각을 시계를 통해 확인하는 과정에 시간이 걸려서 피실험자가 300ms 지난 시점을 자신이 결정한 시점으로 인식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그건 아닌 것 같다. 시계의 바늘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빛이 반짝이는 것에 반응하는 것보다 빠를 것이다. 빛에 반응하는 경우에 빛을 인식하기까지 150ms 정도가 결렸다면, 그 정도를 빼더라도 300-150=150(ms) 의 시간차이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빛에 반응하는 것은 의식적이라기 보다 무의식적인 영역에 많이 걸쳐진 실험이라고 보는 Libet 의 반응이 더 그럴듯 하다.
저자는 주로 대니얼 웨그너(Wegner)의 <의식적 의지라는 착각>을 인용하는데, 대체로 자유의지를 의식적으로 행사한다는 것은 착각이고 다만 그것이 실용적인 면이 있다고 얘기한다. 진화의 과정에서 trial and error 를 머릿속에서 simulation 하는 능력이 생기면서 인간은 자신(과 환경)을 점점 더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할 필요성이 생겼을 것이다. 저자는 언어의 발달과 함께 이런 경향이 촉진된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저자는 기호-실체의 이분화를 언급하지는 않는데, 자신이란 실체의 기호화를 통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능력--즉, 의식--이 발달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실체는 실체 자체를 볼 수는 없다.)
또한 웨그너를 인용하면서, 자아는 center of narrative gravity 기능을 가짐으로써 다른 시간의 나와 연결되는 수단이 된다, 고 얘기한다.

9장 10장: 교육의 가치에 대해서, 그리고 자유의지와 그에 따른 책임에 대해서 논한다. 별로 흥미로운 점은 없다.


결국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양립할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틀린 것이다. 미시적으로 보는 것과 중간 정도의 거시적으로 보는 것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은 철학적인 태도가 아니다. 중간 정도의 거시적 영역은 사회학이나 심리학의 영역이다. 그렇게 억지스럽게 자유의지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자유의지가 없으면 범죄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거 아니냐는 문제가 발생하는 걸 염려하는 것 같은데 (뒤에서 따로 장을 마련해서 논하고 있는 걸 보면 그렇다) 책임을 묻는 것도 결정론의 태두리 안에서 설명하면 문제가 없다. 범죄를 저지른 것이 유전자나 환경이나 등등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였다면 그것에 대해 처벌을 하는 것도 사회로서는 불가피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처벌을 하는 것을 책임을 묻는 걸로 해석하든 아니든. 범죄자가 죄책감을 느끼든 안 느끼든. 이런 것이 바로 라마나 마하리쉬나 바가바드 기타의 주장이기도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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