셸리 케이건 작품. (Death authored by Shelly Kagan)
특별한 것은 없지만 보통 사람이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아이디어들을 모아서 잘 정리해 놓은 책이다.
몇 군데 나와 의견이 다른 부분들이 있다.
초반에 이원론의 타당성을 다루는 부분에서 저자는 인간에게 물리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특성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예를 들어 qualia, 욕망 등등의 감정, 혹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공지능이 존재하는가? 그런데 저자는 그러한 인공지능이 현재는 존재하지 않지만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지을 수 없으므로 그런 특성들이 이원론를 뒷받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물리론에 편향된 시각이다. 현재 가능하지 않으면 "현재는" 물리론이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판단하는 게 옳다. 그런 식으로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면, 예를 들어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있다."라는 명제는 틀렸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미래에 인간이 불사의 능력을 얻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기 때문이다.
중간에 "죽음을 상상할 수 없으므로 죽음을 믿을 수 없다"라는 일견 상식 밖의 주장에 대한 저자의 반박이 나온다. 일단, 주관적으로는 죽음을 상상할 수 없다. 한편, 객관적으로 자신의 장례식을 상상한다면 그 장면을 바라보는 자신이 그 시공간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므로 자신의 죽음을 불완전하게 상상한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장례식 대신에 회의장과 회의에 불참한 자신을 상상해 보라고 한다. 자신이 없는 회의장을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사실 사람은 자신의 장례식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죽음의 경우에는 자신이 없어야 하는 공간이 전 세계이지만 회의 불참의 경우에는 자신이 없어야 하는 공간이 회의장으로서 세계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간과한 주장이다. 회의장 이외의 다른 어떤 장소에서 회의장을 바라볼 수 있지만 세계 밖에서 세계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세계 밖이란 공간은 없으므로.
중간에 존재요건(existence requirement)과 박탈이론에 대한 이야기는 에피쿠로스의 주장에서 출발하는데 흥미로운 부분이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 우리는 죽음과 무관하다. 죽음이 일어나면 우리는 이미 없으므로 역시 죽음과 무관하다. 이 문제에 대해 저자는, 존재요건의 강경버젼과 온건버젼을 구별한다. 강경 = "우리가 뭔가와 '동시에' 존재해야만, 그것은 우리에게 나쁜 것이 될 수 있다.", 온건 = "우리가 뭔가와 '특정한' 시점에 존재하기만 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나쁜 것이 될 수 있다." 온건 버젼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존재하면서 죽음을 생각하는 시점과 죽음이 실제 일어난 시점이 달라도 죽음이 우리에게 나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저자가 명시적으로 에피쿠로스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인간이 하나의 인간이라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물론 이것은 상식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전제이긴 하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꽤 있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됐지만. (한편, 존재하지도 않는 시점에 왜 나쁜 것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박탈이론이 답이 된다고 주장한다. 죽지 않았다면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니까 "상대적으로" 나쁘다는 것이다.) 그런데 피할 수 없는 불행한 사건이 미래에 벌어지는 경우에 그것을 미리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지 않은가? (과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 어리석지 않게 대처하면서, 즉, 죽음에 대해 그다지 걱정하지 않으면서 살고 있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즉, 에피쿠로스의 생각이야말로 바람직한 생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