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 12235    nodeId: 12235    type: General    point: 105.0    linkPoint: 1.0    maker: cella    permission: linkable    made at: 2016.11.21 03:36    edited at: 2016.11.21 03:38
Sacred Magic (Being and Nothingness 해설)
(Jean-Paul Sartre 의 Being and Nothingness 에 대한 Paul Vincent Spade 의 강의)
(앞부분 정리)

데카르트의 두 가지 원리
1. directly given phenomena만 다뤄야 오류가 없다.
2. drectly given phenomena는 contents of mind다.
단, Ego는 특별한 것으로서 정신적인 것이 아니지만
directly given이다.

칸트는 ego가 현상에 영향을 준다는 것(constitution)을 지적함. 객관적인 실재를 noumena 라고 하고, 우리가 경험하는 phenomena는 noumena와 (transcendental) Ego의 합작품이라고 주장함.

post-Kantian들은 noumena는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다고 주장함. 어차피 칸트도 동의하듯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phenomena일 뿐인데, 어떻게 noumena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칸트가 든 근거는 뭐지?)

따라서 저자가 해석하기에, 칸트의 논리에 따르면 noumena는 그 존재 여부를 우리가 알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유아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후설은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를 한다.
후설은 데카르트의 원리1에 동의.
하지만 데카르트의 Ego가 psychological Ego, 즉 진정한 Ego + 심리적 object들이라는 점을 지적함(?).
또한 후설은 원리 2 에 동의하지 않는다.
여러 번, 무한 번 반복되는 생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것을 unversal essence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redness같은 것.)은 한 개의 생각에 갇혀있지 않으므로 transcendental이고, 이렇게 초월적인 것은, 정신적인 것처럼,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라고 주장함.
그리고 모종의 이유(잘 이해하지 못하겠음)를 추가하고, 결국 외부에 실재가 있다고 주장함.
그런데 후기에 가서는 완전히 반대로 돌아선다.
초기 후설에게 Ego란 순수하게 수동적인 관찰자이고, phenomena는 완전히 noumena로부터 생긴다. 하지만 후기 후설은 phenomena가 완전히 Ego로부터 생긴다고 주장한다. 이때 Ego는 Transcendental Ego다.

사르트르는 consciousness를 세 가지로 분류한다. 예를 들어 정육면체에 대해, consception, imagination은 visualization을 동반하지만 perception은 동반하지 않는다. 정육면체의 3면을 보면 보이지 않는 나머지 3면을 추측하고 지금 보이는 것이 정육면체라는 것을 믿는다. 말하자면 이것은 유한한 과거의 경험을 무한한 미래의 경험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consception이다.

사르트르는 초기의 후설에게 거의 동의하지만 단, universal essense 혹은 이것들의 교집합이 구체적인 무언가를 구성한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또한 constitution에 동의하지만 후기의 후설과 달리 현상의 모든 것이 Ego로부터 생긴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실재하는 것은 (1) bare, neutral, uninterpreted thing (being-in-itself)과 (2) act of cinsciousness (being-for-itself)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consciouness가 act 자체이지 어떤 thing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사르트르의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1)을 undifferentiated screen, (2)를 그 스크린에 비추는 light ray 라고 비유한다.
결국 사르트르는 칸트처럼 dualist다. 그런데, 칸트는 phenomena가 ((1)에 해당하는) thing-in-itself를 가린다고 생각하지만, 사르트르는 오히려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현상을 경험할 때 실재는 직접 접한다. (immanent하다.)
(1)은 그 원인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in-itself다. 그것은 무엇인가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즉, 그것은 eternal이다.

저자는 사르트르의 (1)이 Parmenides의 being와 비슷하다고 얘기한다. 이것은 positive thing이다. 그것을 묘사할 때 not가 들어가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것은 not-being에서 being으로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것에서 not-이것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것은, '이것이지 저것이 아닌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영원하고 구분할 수 없는 한 덩어리다. (마치 마하리쉬가 얘기하는 실재와 비슷하다.) 한편, Parmenides에게, appearance, phemenona는 단지 환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이 부분은 다르게 생각한다.

또한 사르트르의 (1)에 대한 관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matter에 대한 관점과 같다. bronze라는 matter를 사람이 인식하는 것은 항상 어떤 form을 가진 bronze로서이다. 동전이나, 덩어리같은 형태를 가진 것이다.

현상은 변화를 수반하고 이것은 negation의 속성을 갖는다. 이 negation은 (2)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바로 consciousness다. (2)는 (1)과 달리 원인없이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의 근원은 바로 (1)이다. consciousness는 intentional하다. 즉, 항상 대상이 필요하다. 그 대상이 (1)이다.

저자는 이 시점에서 헷갈린다고 토로한다. 사르트르는 인간, 즉, consciousness는 절대적으로 free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man makes himself during living, not pre-defined. 라고도 한다. 그러면 따로 원인이 존재한다는 성질과 모순되지 않는가? (더 읽어보면 사르트르의 해결책이 명확하게 제시될지도 모르지만, 내 생각에는 결국 (1)이 in-itself object이듯, in-itself subject가 필요하다. 이러한 혼동, 불명확한 표현은 바로 진아와 개아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

아무튼 (2)가 (1)을 필요로 하는 것을 facticity라고 하는데, 인간은 이것, 저것 사이에 선택할 자유는 있지만, 선택하지 않을 자유는 없다, 는 것이다.

또한, (2)의 중요한 성질은, consciousness is its own nothingness, 이다. 그것은 contradictory다. logic의 영역 밖이다. 하지만 logic의 영역은 existence 영역의 일부에 불과하다. 즉, (2)도 존재한다. Parmenides이래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이 모순을 피하거나 모순이 아닌 것으로 바꾸려고 했지만, 사르트르는 그것의 존재를 그냥 인정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결국 제목이 being and nothingness 가 된 것 같다.

사르트르는 consciousness를 자신을 object로 보는 reflective와 뭔가에 몰입하는 경우와 같이 그 뭔가가 object가 되는 non-reflective로 구분한다. 한편, 모든 act of consciousness는 object를 aware하는 positional consciousness이며 동시에 'point of view' 혹은 act 그 자체를 aware하는 non-positional consciousness이다. 이때 point of view,혹은 act를 object로서 aware하는 게 아니라는 것에 주의하라. (내 생각에는 그냥 subect라는 단어를 쓰면 될 것 같은데.)

사르트르는 (1)을 opaque하고 solid하다고 하고, (2)를 빛과 같이 transperant하다고 한다. (어쩌면 저자의 표현일지도. )
사르트르가 보기에, 후설의 Transcendental Ego는 act of consciousness를 만들어 내는 불투명한 덩어리다. 그것은 투명한 의식 안에 있지만 의식은 아니다. (마치 개아나 바사나를 의미하는 듯.) 그는 이렇게 투명한 것과 불투명한 것이 섞여있을 수 없다고 주장함. 즉 후설의 Transcendental Ego를 부정한다. 사르트르는 T.E.를 인간 안에서 act of consciousness와 여러 action들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자유를 방해하는 작은 god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절대적 자유에 모순된다는 이유로 God를 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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