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영화 2016년 작품.
2015년에 찍었다고 한다.
새롭게 연남동에서 찍었다. 얼마 전에 가본 공원이나 거리가 보인다.
당신에 대한 이야기, 당신의 도덕성, 당신의 기억, 이름, 얼굴 이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고 그 이면에 본질적인 것이 있다는 주장.
어떻게 보면 상당히 노골적으로 주장하는데 관객들의 평을 보면 그렇게 노골적인 것도 아닌 것 같다.
홍상수의 인터뷰를 보면 이 영화는 흔히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소유냐 존재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인터뷰를 보면, 홍상수가 생각하는 ("당신의 것"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이라는 것은 본질적인 자신이 아니라 부차적인 것으로서 본질적인 것과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름, 얼굴, 기억같은 것들이 바로 "당신 자신"을 의미하는 것 같다. 마치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란 사회집단의 경험 모두라고 확장하듯이, 사람이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확장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결국 이 영화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정체성 혹은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홍상수의 영화가 새로운 수준에 접어 들었다.
이렇게 나이든 사람이 계속 발전해가는 것을 보여주는 예도 그리 흔치는 않다.
중간 중간 영수의 상상을 잠깐 잠깐 보여주는 게 아주 자연스럽다.
특히 마지막에 영수가 자다가 일어났을 때, 그 바로 직전의 장면이나 혹은 이 모든 이야기가 상상이거나 꿈이 아닐까 하는 분위기를 갖는 것이 재미있다.
이 모든 것이 꿈인가? 하지만 잠시 후 민정이 들어오면서 그러한 전형성에서 벗어난다.
아마 현실에서 이런 여자를 만난다면 아마 최악의 여자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란 원래 판타지이고 이 영화는 특히 판타지적이다.
그리고 그 판타지 속에서 이 여자는, 가장 순수한 여자가 된다.
최악의 여자를 엮어서 만들어 놓은 결과물이 가장 순수한 여자이고
지극히 현실적인 장면들을 엮어서 만들어 놓은 결과물이 판타지가 되었다.
한 가지 더 쓰자면, 영수는 다리가 멀쩡했다가 민정이 떠난 다음부터 한 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다닌다.
그리고 끝에서 민정이 돌아온 다음 잠에서 깨어난 장면에서는 이불을 덥고 있어서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다.
중간에 혼자 술 마시는 영수에게 합석하자고 제안하는 여자는 한 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다.